얼음골 깔딱고개만 오르면 "고생 끝 행복시작"
영남 알프스 굽어보며 '산멍'… 세상 번뇌 훌훌

우먼타임스 = 박상주 편집국장

은빛 억새가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빨간 단풍을 입은 산맥이 넘실넘실 달립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스칩니다. 영남 알프스의 천황산 정상인 사자봉(해발1,189미터)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는 중입니다. 사자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셈입니다.

멍때림을 합니다. 마음 속 켜켜이 쌓여 있는 집착과 미움과 번뇌를 산 바람에 날립니다. 산멍은 치유이고 충전입니다. 불멍과 비멍과 바다멍도 좋지만 산멍의 효능은 더 좋습니다. 산멍은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입니다.

영남 알프스 아홉 개 봉우리 중 두 번째로 높은 천황산과 다섯 번 째인 재약산 등반을 했습니다. 영남 알프스의 남동쪽 능선 12킬로미터를 더듬는 코스입니다. 천황사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해 얼음골~천황산정상~천황재~재약산~사자평~고사리분교~층층폭포~흑룡폭포를 거쳐 표충사로 하산을 했습니다.

영남 알프스란 가지산도립공원의 별칭입니다. 최고봉인 가지산(해발 1,241m)을 비롯해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 신불산(1,159m), 재약산(1,108m), 영축산(1,081m), 간월산(1,069m), 고헌산(1,034m), 문복산(1,014.7m)  등 해발 1,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아홉 개를 아우르는 이름입니다. 경남 울산과 밀양, 양산, 청도, 경주 등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255㎢ 넓이의 산군(山群)입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의 한 중년 남자가 발 아래 펼쳐진 산 봉우리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자신의 일행에게 설명을 합니다. 

“저기 건물들 많이 들어선 곳이 보이재? 저기가 대구야. 그 뒤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산이 팔공산! 서봉과 비로봉, 동봉이 뚜렷하게 보이재? 그 앞쪽으로 보이는 저 산은 비슬산이고, 구름 위로 봉우리만 보이는 저 산은 가야산이야. 그 너머가 지리산인데, 오늘은 안 보이네. 요기 가까이 보이는 것들은 영남 알프스 봉우리들이야. 바로 요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재약산, 저건 간월산과 신불산!”

하루 종일 앉아서 산멍을 하고 싶지만, 갈 길이 멉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재약산으로 향합니다. 너울너울 이어진 편안한 길입니다. 

사실 천왕산~재약산 산행의 힘든 구간은 얼음골의 너덜겅 2~3킬로미터 뿐입니다. 산행 들머리인 천황사를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얼음골의 너덜겅은 거칠고 가파른 깔딱고개입니다. 산행 초반부터 힘든 너덜겅을 오르는 수고를 피하고 싶으면 얼음골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허준 선생이 스승 유의태를 해부한 장소로 알려진 동의굴을 볼 수 없습니다. 

얼음골 깔딱고개는 갈림길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서 끝이 납니다. 갈림길은 얼음골과 케이블카 승차장과 천황산 정상쪽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입니다. 갈림길부터는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일렁이는 억새 능선길을 걷습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거대한 출렁다리 위를 걷는 기분입니다. 이름하여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입니다. 하늘억새길은 간월재에서 신불산과 영축산, 천황산, 능동산을 거쳐 다시 간월재를 연결하는 30㎞의 순환형 탐방로입니다.

1구간은 간월재~신불산~신불재~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억새바람길 4.5㎞입니다. 2구간은 영축산~단조성터~신불산휴양림~죽전마을로 이어지는 단조성터길 6.6㎞입니다. 3구간은 죽전마을~주암삼거리~재약산~천황산로 이어지며 사자평억새길 6.8㎞입니다. 4구간은 천황산~샘물상회~능동산~배내고개로 이어지는 단풍사색길 7.0㎞입니다. 5구간은 배내고개~배내봉~간월산~간월재로 이어지는 달오름길 4.8㎞입니다.

무념무상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재약산 정상입니다. 시원한 대머리 형상의 천황산 정상과는 달리 재약산 정상은 날 선 까치머리 형상입니다. 거친 기암들이 솟아 있는 정상은 비좁습니다. 인증샷을 찍으려고 몰려드는 산객들을 위해 얼른 자리를 비켜줍니다.

오늘 산행의 백미인 사자평 억새 군락지에 도착했습니다. 사자평은 우리나라 최대의 고산습지입니다. 무려   413만㎡(125만평) 규모의 사자평을 덮은 억새는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억새 꽃 위에 하얗게 부서집니다. 가슴이 울렁울렁 합니다.

사자평에 전하는 전설 한 토막. 신라 흥덕왕 때 셋째 왕자가 이름 모를 병을 얻었습니다. 왕자는 명약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사자평 영정약수(靈井藥水)를 먹고 병이 씻을 듯 나았습니다. 이후 약이 묻혀 있는 산이라고 해서 재약산(載藥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답니다.

신라 왕자님이 약수를 먹고 병이 나았을까요? 일렁이는 억새의 아름다움을 보고 병이 치유된 건 아닐까요? 혹시라도 몸이 아프신 분이 계시다면 재약산을 올라 보세요. 약수도 드시고 억새도 감상하시면 신라왕자처럼 씻은 듯 나을지 누가 압니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우먼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