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불행 부심(負心)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서 불행한 순간이 없지야 않겠지만, 이야깃거리 면에서는 본격적 불행으로 점철된 가정에 대적할 수 없다.

이야기꾼이 꿈인 내가 바로 그런 가정의 일원이올시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불행이 가져온 행운이라니. 물론 행운의 방문이 반드시 행복으로 귀결되진 않는다. 당사자가 이야기화할 때, 그때가 행복이 설 자리가 나는 시점이다.

유년 시절, 높은 데서 뛰어내리곤 했다. 담장이고 장롱이고 가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어떤 높이는 죽을 수도 있었다. 이마가 찢겨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고, 수차 실려 갔어야 했다. 나는 “여자애가 왜 이리 극성맞냐”는 탐탁지 않은 이유로 혼나기 싫어 꿰매거나 붙여야 할 상황 아니면 몰래 견뎠다.

하굣길의 그 아파트 놀이터에는 그네가 있었다. 아홉 살 소영은 그네를 평범하게 타지 않았다. 서서 타다가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 몸을 던졌다. 찰나의 하늘을 날아 ‘여2’를 펼친 여홍철처럼 모래밭에 착지! 자주 그랬다. 큰코다칠 미래의 예언이다. 아니나 다를까 태양이 작열했던 오후, 나는 뫼르소도 아닌 주제에 날아오른 순간 햇볕이 쨍했단 이유로 개구리 자세 그대로 모래밭에 처박혔다. 가장 먼저 박힌 게 코, 그다음이 입이었다(그 반대일 수도 있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하얬고 뎅 뎅 천국의 종소리가 고막을 간질였다(나의 애처로운 숫자로 구성된 아이큐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곧 살았음을 알았다. 이토록 생생한 쪽팔림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나니. 아픔이 먼저 오면 부끄러울 새가 없건만 어찌하여 통증은 창피보다 한발 늦는지. 집중된 시선에 그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해 움츠려있었다는 듯 튀어 일어났다. 구석에 가 앉아 연신 모래를 뱉고, 코피를 삼키고, 어지럼을 달랬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온몸이 욱신댔다. 모래밭 개구리 자국이 꼭 만화 같았다. 코피에선 그네 체인을 잡았던 손내음 맛이 났다. 대책 없는 초딩이었다.

뛰어내린 족족 카메라에 찍혔다면 사진마다 한 사람 더 보일 것이다. 안 그래도 큰 눈을 최대한으로 뜨고서 내 쪽을 향해 있는 동급생 ‘장해미’가. 그렇다. 나는 관종이었다. 구경꾼이 볼 때만 뛰어내리는 허세 충만 어린이. 놀이터를 나와 공터를 지나면(80년대엔 서울에도 노는 땅이 많았다)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잡초와 덩굴로 위장한 판잣집이 있었다. 나는 그 집 담 아래를 관객석 삼아 장해미를 앉힌 다음 조선 후기의 소설 낭독가인 전기수로 변신했다(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 연기했으니 엄밀히는 전기수가 아니었지만). 여기, 각진 클로버 책가방을 멘 여자아이 둘이 담벼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다.

“으스스하지. 폐가야. 외톨이가 돼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집을 폐가라고 하거든. 뭐, 매일 밤 열두 시엔 귀신이 찾아오지만. 해미 너도 따라 해봐. 폐가.”

“폐가.”

“어때? 무서워서 폐가 막 아프지?”

“......폐가가 어떻게 아플 수 있어?”

“아니, 폐. 폐가가 아니라 그냥 폐. 우리 몸속에 들어있는 건데 숨 쉴 때 필요해. 숨이 잘 안 쉬어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꼬집히는 것처럼 아프다고.”

“후하후하. 나는 숨 잘 쉬어지는데.”

“장해미! 네가 이 집에서 일어난 일을 몰라서 그런 거거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뭐랄까. 지금의 내겐 이불킥 감이다. 개연성이라고는 우리집 반려견 쪼꼬의 눈꼽 만큼도 없었던 이야기들. 그러거나 말거나 말미의 장해미는 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기수 놀이를 멈출 수 없었다. 순전한 픽션은 아니었다. 초보 이야기꾼은 본인 얘기를 씨앗으로 뿌리는 법.

우선, 나의 부모가 전쟁처럼 싸웠던 어젯밤을 ‘폐가’에 갈아 넣어 한 맺힌 엄마 캐릭터를 탄생시킨다. 그 엄마한테 높은 데서 뛰어내릴 때마다 볼기를 석 대씩 맞는 딸과 외할머니 고추장 독 안에 연탄재를 투하해 종아리를 맞는 아들도 등장한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빠는 “왜 애들을 때리냐” 소리 지르고 엄마는 “이게 다 너 때문”이라면서 울부짖는다. 그 난리 속에 별안간(대체로 인물들은 갑자기 불시에 우연히 불현듯 등장한다) ‘내 다리 내놔 귀신’ 내지는 ‘월하의 공동묘지 처녀귀신’이 튀어나오고! “다 잡아먹겠다 이히히히” 귀신이 일가족을 잡아가는 바람에 ‘즐거운 나의 집’이 결국 폐가가 되고 말았다는 어이 상실 막장 스토리. 죄다 이런 식이었다.

다음 코스, 공터에 설치된 방방(트램펄린)을 뛰면서 나는 안전한 추락이 보장된 비행을 즐겼다. 하늘 꼭짓점을 찍을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오늘도 성공!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에 이불을 뒤집어썼던 전날 밤의 나는 어느덧 사라졌다. 방방 할아버지는 화로를 놓고 뽑기(달고나)도 만들었다. 전기수가 이야기 값을 받았어야 마땅하나 관객에게 뽑기를 사는 건 으레 나였다. 해미는 용돈을 받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매번 내 이야기에 집중하고 반응하는 친구가 나는 고마웠다. 하트 모양 뽑기도 성공. 깔끔하게 분리된 하트를 내밀자 방방 할아버지가 별 모양 뽑기를 또 만들어 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메기’의 감독 이옥섭과 그 영화의 주연배우 구교환은 연인 사이다. 힘든 일이 생기면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이건 주인공 서사야.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다 해결돼. 너무 쉽게 풀리면 주인공이 아니잖아? 이게 다 산을 넘고 있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편안해져”

또한 내가 좋아하는 한 언니는 책 선물을 주면서 표지 뒷장에 이성복 시인의 문장을 적어 주었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등 떠밀려 어 어 하다가 절벽에서 추락하듯 싱글맘이 되면서 내 고통이, 불행이, 문장으로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추락하는 동안, 죽음을 살아가는 고통은 바로 말하여지지 않는다. 한동안의 형태가 당황이랄까 소리 없는 포효여서 말로 빚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입을 닫고 있지만 속은 소란하다. 시원하게 울 수도 없다. 눈물은 정제된 슬픔인데 고통 직후의 고통은 그저 날 것이므로. 불순물 함량이 높아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하지만 온전한 행복이 없듯 완전한 불행도 없다. 온통 고통인 그때, 그때가 나를 만나는 진정한 호시절이자 드물게 기회다. 고통이 양념처럼 섞여 있을 땐 거울이 되어줄 타인이 필요했지만 온통 고통 속에선 나를 통해 나를 봤다. 자신에게 침잠한 데미안처럼 타인의 눈엔 언뜻 죽은 듯 보이지만 실은 내게 몰두해 있는 상태. 관찰자와 피관찰자가 일치할 때 하나의 세계가 깨지고 새로 태어난다. 이 과정은 일정 주기로 반복됐고 부화 소요 시간이 짧아지면서 글쓰기에 이르렀다. 양초로 쓴 A4용지에 초록 물감을 뿌린 것처럼 드러난 문장들, 카타르시스! 놀라진 않았다. 신기한 현상도 아니다. 그저 숙명이 개입한 것뿐. 관종이면서 이야기꾼으로 태어난 내가.

아홉 살 딸 소림은 아홉 살 소영만큼 위험하게 그네를 타지 않지만 조금은 모험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괜찮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작가 촬영)
아홉 살 딸 소림은 아홉 살 소영만큼 위험하게 그네를 타지 않지만 조금은 모험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괜찮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작가 촬영)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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