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예요?”

느릿하고 천진한 여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부인일까?

“네, 일하고 있어요. 손님을 태워서 아깐 전화를 못 받았어요.”

“네에에. 돈 많-이 벌어요.”

들을수록 핸드폰 너머 말투는 어리고 목소리의 연배는 높아갔다. 어머님인가?

“네. 열심히 운전해서 돈 많이 벌겠습니다.”

“네에에. 그리고요. 착하게 살아야 해요.”

“네, 오늘도 착하게 살게요, 어머니.”

“네에에.”

‘네’와 ‘네에에’ 가 오가던 통화가 끝나자 기사님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눈썹도, 이마의 주름도 제자리를 찾았다.

44번째 노을을 보던 어린왕자의 표정이 저렇지 않을까? 순간 배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가슴이 찌르르한 것도 같아 괜스레 “소림아, 차 안에서 핸드폰 보면 멀미 나” 하는데 기사님이 헤 웃는다.

“우리 어머니예요. 치매로 어린아이가 됐는데도 착하게 살라는 당부만은 잊지 않으시네요.”

그러면서 기사님은 나도 아는 시를 대략 읊었다. 시를 말하는 기사님을 만나다니, 오늘이 다시없을 행운의 날로 여겨졌다.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시 한 편쯤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알 것 같으니까.

“어머니/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아무리 멀어도/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정호승 ‘밥값’)

기사님은 자신이 밥값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밥값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니 그것이 곧 착하게 사는 모습 아니냐면서. 어머니에게 더는 가스 불 잠그고 외출하라는 당부를 못 해 슬프지만, 어머니로부터 변함없이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받는 것만큼은 행복하다고 했다. 어린아이가 됐다 한들 기사님에게는 언제까지나 어머니인 이유다.

언젠가부터 나는 타인에게는 ‘착해요’를 건네지 않는다. ‘착하다’는 사전적 의미대로 곱고 어진 단어이지만 요즘은 주관 없고 무능한 사람이나 예쁘고 몸매 좋은 사람, 가성비가 좋은 물건 앞에도 쓰인다.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내가 그 말을 듣는 것은 좋다. 발화자의 의도보다는 듣는 나의 해석에 의의를 둔다. 상대가 어떤 의미로 나에게 착하다고 했는지까지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착하다’에 관한 첫 기억은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였지만.

대여섯 살 때 엄마와 이웃 아주머니 몇 분이 우리 집 안방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인형 놀이 중이었던 나는 무엇 때문인지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다. 내가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자 이층 아주머니가 나를 칭찬했다. “소영이는 착하게도 울지”. 그때부터 나는 우는지도 모르게 울었다.

나쁜 칭찬을 기점으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려 꺼릴 법도 한 그 말이 나는 좋다. 엄마 노릇을 하다가 참뜻을 체득했다. 몇 년 전, 어린이집 하원 길에서 소림이가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내 다리를 껴안고 흐느꼈다. 전말은 이러했다. 어린이집에서는 원아의 생일을 챙겼다. 그날의 생일 주인공 우진에게 선생님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의 권한을 주었고, 댄스 타임이 되자 우진이가 손가락으로 소림 외 두 명을 가리키며 제지해 그 세 명만 춤을 못 췄다는 것.

“나도 춤추고 싶었는데 의자에 앉아서 구경만 해야 했어. 참, 우진이가 음료수도 마시지 말라고 했고, 펭수 케이크도 펭수 코 부분만 먹으랬어”

“저런, 우리 소림이 무안하고 화났겠다. 선생님께 말 안 했어?”

“엄마, 왕게임에서는 왕이 하라는 대로 해야 착한 백성이랬어.”

저녁을 차리는데 연속으로 문자가 왔다. 소림과 함께 음료수도 못 마시고 의자에 앉아만 있었던 두 명의 친구 엄마들이 속상함을 토로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일련의 일을 할수록 체온이 상승했다. 얼굴이 뜨거워지더니 종국엔 두통에 시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책꽂이에서 아무 연습장이나 뽑아 한 장 북 뜯었다. 식탁 위에 종이를 놓고 그 옆에 가진 것 중 제일 필기감 좋은 볼펜을 두었다. 나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 잠시 그것들을 노려보다가 뜯긴 부분에 자를 대고 사무용 칼로 깔끔하게 다듬었다. 소등 후 램프 하나만 켰다. 그럴 때의 나는 이 순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최소 일주일을 머리카락 쥐어뜯는 걸로 허송세월하는 평소와 달리 분노가 동력일 땐 ‘글쟁이 AI’로 변신, 일필휘지로 A4 두 장을 꽉꽉 채우는 것이다(틈새 광고: 마감을 위한 분노유발자 모집합니다).

헤밍웨이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 문장 곳곳을 쳐냈다. 다음날, ‘선생님께’로 시작하는 앞뒤 꽉 채운 한 장의 편지를 어린이집 알림장에 책갈피인 양 끼어 보냈다. 선생님의 노고를 기리는 감동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편지는 담백한 항의서였다. 물론 ‘담백한’은 자평일 뿐 선생님은 언짢았을 것이다. 형식이 핵심이니까. 번호를 매기며 써 내려간 구구절절 항의서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원아 간 수직 관계를 ‘굳이’ 조장하는 왕 게임이 생일 선물로는 온당치 않으므로 중지를 촉구하는바, 더불어 우진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왕 게임은 사라졌고, 소림의 상처에 연고가 발라졌다. 사과를 받아 상쾌해진 얼굴로 엄마, 하고 달려 나오던 소림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원길에 문방구 쇼핑을 하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소림아, 진짜 착한 게 뭔지 알아? 무조건 네, 네 하지 않고 아닌 건 아니다! 자기 목소리 내기. 그래야 나와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어.”

“사실은 나도 음료수랑 펭수 케이크 먹고 싶다고, 춤추고 싶다고 우진이에게 말하려 했어. 그런데 말하려고만 하면 눈물이 나와서 못 했어.”

“엄마도 눈물이 말보다 빨라. 그래서 자꾸 연습했더니 어느 날 목소리가 눈물을 박차고 나오더라? 그럼 엄마가 내는 퀴즈 맞혀 봐. 우리가 제일 먼저, 최고로 착하게 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게?”

“음......나 자신?”

헤밍웨이 할아버지도 이건 몰랐겠지. 영리한 내 딸!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결제하면서 기사님과 “오늘도 착하게!” 덕담을 주고받았다.

착함은 강함이다. 느닷없이 강해질 순 없었다. 곁의 착한 마음들이 합세해 나의 착함이 완성됐다. 착한 마음은 자발적으로 낮은 곳에 임한다. 모이고 모여 뭉쳐진 그들은 강력해져 막강해진다. 낮은 기압일수록 더 많은 수증기와 공기를 빨아들여 세력을 키우는 태풍처럼. 그렇게 강해진 착한 마음이 토대가 되어 세상이 잘 돌아간다고 믿는 나로선 내 아이에게 착하게 살자 못 할 이유가, 그 말을 하는 데 겁먹을 까닭이 없다. 기사님의 어머니처럼. 그리고 지구 입장에서는 태풍이 자정 작용이잖은가. 그나저나, 이토록 절친 같은 기사님이라니! 소림 엄마의 택시 예찬은 계속되어야 한다.

너무 춥거나 더운 날, 비나 눈이 오는 날, 소림이랑 외출해야 할 때 내가 택시를 타는 것 또한 우리 모녀를 지키는 착한 행동이다. (픽사 베이)
너무 춥거나 더운 날, 비나 눈이 오는 날, 소림이랑 외출해야 할 때 내가 택시를 타는 것 또한 우리 모녀를 지키는 착한 행동이다. (픽사 베이)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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