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한 지 32년, 이토록 엄청난 양의 비를 목격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80년인가 100년 만이라는 기록적인 폭우는 곳곳에 많은 사건과 사고를 일으켰고, 누군가는 폭우의 거센 위력 앞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라 해도 천재지변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소식은 신림동 반지하 주책에 거주하던 일가족 세 명이 집 안에서 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은 일이다. 도로에 물이 차면서 수압으로 인해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고, 유일한 탈출구인 창문은 방범용 창살이 설치되어 있어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구조 요청으로 119가 도착했을 땐 좁은 골목과 높아진 수위로 인해 진입이 쉽지 않아 결국 일가족은 참변을 당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을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게다가 이번과 같이 짧은 시간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쏟아지는 비라면 더더욱. 설령 폭우의 정도를 예측할 수 있었다 쳐도, 서울의 수해 방지 대책은 그걸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여러모로 취약한 거주 형태에, 발달장애 가족을 둔 가구였다고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신림동 일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정말로 정말로 막을 수 없었을까, 하는 의심의 씨앗 앞에서 부푼 마음을 안고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2014년의 세월호 비극을 떠올리지 않기란 참 힘겨운 일이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마음이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뾰족한 심정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유년을 전라도 소도시에서 보내다 중학교 3학년 때인 1990년에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엔 용산구의 가파른 경사에 지어진 낡은 다세대 주택 2층에서 살다 집안 사정으로 송파구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한동안 그 곳의 반지하 주택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반지하 주택에서 살았던 시절은 인생을 통틀어 그 몇 년이 전부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름 장마철 습기처럼 뇌리 곳곳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다. 

몇 해 전 아카데미 수상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며 꽤나 고통스러웠다. 반지하 주택에 살았던 내 경험을 훔쳐다 영화에 쓴 것만 같았다. 특히 영화 속에서 언급한 반지하 주택 특유의 ‘냄새’에 관한 부분과 세찬 빗줄기로 인해 집이 순식간에 침수되는 장면은 순식간에 그 시절을 소환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반지하 주택에 사는 내내 불행했던 건 아니다. 누군가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을 정도의 침수 피해를 겪지도 않았다. 당시 우리 집 형편에 서울 하늘 아래 한 식구가 흩어지지 않고도 그렇게라도 살 곳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고, 그 시절을 잘 견딘 덕분에 그 후 지금까지 지상 층에 위치한 주택에서만 살았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고작 그 잠시의 경험에 과몰입하고 있는 걸까? 글쎄다. 벽지와 벽지 틈으로 들어찬 습기가 피워낸 곰팡이를 반려 꽃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과 덜 마른 옷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아본 일이 있다면 그리 말할 순 없을 테다. 그런 조건들이 나라는 인간을 낮게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만 같아서 반지하 주택 거주 시절의 나는 늘 마음 어깨가 안으로 둥글게 굽어 있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기를 쓰고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까지 위를 향해 가려 애쓰는 이유도 높이 올라갈수록 생존 가능성 즉, 인간답게 살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적인 위치만이 아닌, 사회적 위치를 포괄한다. 그러나 기택 가족이 향후 계단을 ‘내려’가는 집이 아닌 ‘올라’가는 집을 소유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기택 가족에게 부족한 건 과연 노력이었을까? 사회적 기회가 아닌? 계획이란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가진 자들에게만 부여되는 일종의 자격이지 않나? '태생'은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항목임에 틀림 없다고, 영화관을 나서며 더 이상 반지하 주택에서 사는 것도 아닌데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신림동 일가족을 덮친 비극의 원인을 한 가지로 특정하긴 힘들다. 유례없는 폭우, 가족 중 한 명은 발달장애인에 한 명은 미성년자였으며, 거주 형태는 삶의 질이 결코 높다고 하기는 어려운 반지하 주택이었다. 이유를 찾는 행위는 물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앞으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과연 우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풀어야 하는 것이지 현상을 없애는 걸 해결 방법으로 삼을 수는 없다. 장애인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시설로 모는 것, 반지하 주택을 없애는 것, 이런 일들이 정답일 수 없다는 뜻이다. 환경의 개선은 의식의 개선과 통하는 문제다. 누굴 탓하는 것만으로는 소란한 갑론을박 속에서 또 다른 분쟁과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수마가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남은 고통이 채 아물지 않았다. 비극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을 보며, 좁은 식견에 갇혀 자신과 다른 이를 틀리다 말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는 목소리 앞에서, 시민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개선 시켜야 할 의무를 가진 이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모습 앞에서, 2014년 세월호 비극을 통해 우린 진정 아무런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한 건가 싶어 절망에 빠졌다. 시민은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정부는 정부로서의 역할을, 어른은 어른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해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란다. 의무를 배수구에 버리는 쓰레기마냥 내팽개치면서까지 추구하는 가치가 일부 계층의 이익실현과 유지라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이번 수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을 빈다. 

이번 폭우로 물에 잠긴 서울 관악구 반지하 건물. (연합뉴스)
이번 폭우로 물에 잠긴 서울 관악구 반지하 건물. (연합뉴스)

(서지은은) 걷고 말하고 듣고 읽고, 특히 쓰는 걸 좋아한다. 많은 페친을 둔 페이스북의 인플루언서다. 여러 직업을 가진 싱글워킹맘으로 최장수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의 꿈을 꾼다. 나이 마흔 다섯인 2020년, 첫 에세이집 '내가 이토록 평범하게 살 줄이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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