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본다. 그날 저녁 소림이가 선택한 영상은 ‘코타로는 1인 가구’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제목만 보면 혼자 사는 성인의 이야기일 듯싶지만 코타로는 네 살배기 남자아이다. 원룸 아파트로 이사 온 코타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홀로 살아간다. 코타로의 생활력이란 또 얼마나 강한지 옆집 만화가 청년보다 어른스러울 때가 많다. 그렇다 한들 코타로는 네 살, 혼자 자기 무서워하고 만화 속 영웅에 열광하는 꼬맹이다.

계란말이를 오물거리면서 “맛있다, 만화 재미있다”를 연발하던 소림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났다! 코타로의 회상 장면에서였다.

코타로와 엄마가 식탁에 마주 앉아 있다.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빠를 코타로가 경찰에 신고한 지 얼마 안 된 시점 같았다. 엄마가 낮게 입을 연다. “코타로, 실은 엄마 말이야. 아빠랑 헤어졌어.” 흐느껴 우는 엄마와 달리 연신 음식만 입에 넣는 코타로. 엄마가 트렁크를 끌고 현관으로 향한다. 코타로가 돌아보지 않는 엄마에게 물었다(코타로는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따라 사극 말투를 쓴다).

- 어디 가나?

- 잘 들어. 엄마가 없어도 잘 살아야 해.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엄마가 돌아올 거야. 알았어?

- ..알았다.

돌기둥이 될 것도 아닌데 코타로의 엄마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 그러니까 잘...살아가야 해.

“어떻게 혼자 떠날 수가 있어?” 회상 장면이 하얗게 사라지기도 전, 소림은 길길이 날뛰었다. 불같이 화를 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소림의 목소리가 떨렸고 그 모습을 보는 내 눈이 커졌다. 처음 보는 소림이 모습이다.

“엄마는 나만 두고 안 가지? 응?” 내 품으로 달려 들어온 아이가 시선을 맞추고 다짐을 요구했다. 눈 한번 깜박, 하면 소림의 눈동자에 담긴 내가 눈물을 타고 떨궈질 것이었다. 아이 머리를 쓸어주며 나는 그때 무어라 했던가.

“소림아, 엄마랑 아빠도 코타로의 부모처럼 헤어졌지만 네 옆에는 항상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소림은 망설이지 않고 “엄마, 엄마가.” 했다. “그래. 엄마는 언제까지나 소림 곁에 있을 거야. 매일 아침 뜨는 해처럼.” 내 등을 감싸 안은 작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거지 내내 갖은 상념이 일었다. 그때 난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한부모로 살 자신이 없어서 “소림이는 내가 키우고야 말겠어!”라고 처음부터 큰소리치지는 못했다. 그나마 아이에게 덜 미안한 지점은 망설임이 짧았다는 데 있다. “인생길 까짓 거 둘이 함께라면 문제없어. 우리가 바로 무적의 모녀다! 가자 소림!” 결정이 연료가 됐다. 나로, 우리로 살기 위해 소림을 어부바한 내가 미지의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뚜벅뚜벅, 성큼성큼 때로는 우다다다.

계란말이 접시를 헹구며 생각했다. 조금 전 소림의 분노와 불안에 나도 일조했을까? 아이의 심연에 자신을 떠난 아빠는 살고 있을까? 나는 어떤 엄마지? 아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지만 이상적인 엄마 상을 설정해 실천한다면 더 활기차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순간, 머릿속에 얼굴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영화나 드라마 인물 소개란에서 한 배우의 이름을 발견하면 든든한 보험에 가입한 듯 편안해진다. 악역을 맡아도 선함이 묻어나오는 그 배우의 이름은 황우슬혜. 영화 ‘미스 홍당무’로 데뷔한 그녀는 단막극 ‘조금 야한 우리 연애’에서 인상적인 대사를 연기했다. 그녀가 내 마음에 콕 박힌 순간이다.

속초 MBS 프로그램 ‘정겨운 내 고향’의 PD와 리포터로 만난 동찬(이선균)과 모남희(황우슬혜)는 매일같이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정 많은 모남희는 성별 불문 동료들에게 김치고 잠자리 제공이고 하여간 퍼주기 일쑤. 이에 질투 난 동찬이 남희에게 빈정댄다.

동찬: 좀 헤픈 거 알죠? 박애주의자야, 뭐야!

남희: 넌 그렇게 고결하냐? 넌 한 번도 안 헤퍼 봤어? 그럼 그게 잘못된 거니? 누가 사랑을 그따위로 자기 거 다 움켜쥐고 한대니, 싸가지 없게.

동찬: 헤픈 게 사랑이니?

남희: 헤픈 게 사랑이야! 이 바보천치야!

2010년, 본방사수 중이었던 나는 남편에게 저것 보라며 큰소리쳤다. “자기가 나한테 고백하면서 했던 말 기억나? ‘우리 사귀어요.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누나가 헤픈 사람만 아니라면 좋겠어요’랬잖아. 난 그 말이 불편했어. 들었지? 헤픈 게 사랑이야!”

그래, 헤픈 엄마가 되자! 마구 헤퍼져서는 엄마가 짐 싸서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따위 자식에게 안겨주지 않겠다! 빛의 속도로 고민거리를 해결하다니, 거만하게 웃으며 개수대를 정리하는데 이런, 곧바로 ‘멍때리기’가 찾아왔다. 새로이 할 게 없었다. 소림에게만큼은 늘 헤퍼 온 나다. 소림도 나에게 헤퍼 왔고, 반려견 쪼꼬와도 서로 그래왔다. 헤픔을 나누어도 각자의 내면엔 홀로 남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상주한다.

꼬맹이 코타로는 비 오는 날이면 지하철역으로 나가 우산 없는 이에게 우산 씌어주는 이벤트를 연다. 우산 없는 이를 바래다주는 코타로의 한쪽 어깨가 젖어 들어가고, 아이는 그런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과거에 코타로에게 우산 씌어주던 아빠의 한쪽 어깨도 그러했다. “아빠의 어깨가 젖었어, 어떡해.” 걱정하는 아들에게 아빠가 말한다. “아빠는 괜찮아. 참, 우산을 씌워줄 때 중요한 게 뭔지 알려 줄게.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우산을 씌워주는 거야. 젖은 어깨는 상대방을 생각했다는 증거지.” 코타로는 훗날 부모님과 우산을 쓰게 된다면 자신의 젖은 어깨를 보여주리라 다짐한다.

소림의 세상도 맑았다 비 왔다 반복일 것이다. 소림월드에 우기가 시작하는 날, 나는 굳이 하나의 우산만 챙겨 아이에게 달려갈 것이다. 엄마가 너무 늦진 않았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소림에게 우산을 기울여 씌운 다음 내 한쪽 어깨를 헤프게 사용하련다. 아이가 내 젖은 어깨를 걱정하면 나는 하하 웃으며 “괜찮아. 네 어깨가 뽀송뽀송하니까 그거면 됐어.” 사랑을 생색내야지. 그런 우리를 상상하는 지금, 소림의 한탄이 들려온다. “에휴. 작년 내 생일 때 보고 못 봤네. 아빠 말이야. 아빠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작년 소림의 생일 이후 지구가 태양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다. 소림은 하루 동안의 헤픈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코타로는 1인 가구’. 혼자 사는 4세 꼬맹이 코타로의 이야기다.
일본 애니메이션 ‘코타로는 1인 가구’. 혼자 사는 4세 꼬맹이 코타로의 이야기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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