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 제주도. 번개탄. 택시. 이불. 계단. 바다...바다...’

나는 어떻게 이 단어들에 묶이게 되었나. 여기는 제주도의 한 해안도로. CCTV를 되감아 보자. 때는 2018년 11월 2일 새벽 2시 47분. 택시에서 여자가 내린다.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품엔 이불로 감싸진 세 살배기 딸이 안겨 있다. 잉태의 시절처럼 하나로 보이는 모녀가 도로에서 바다로 난 계단을 내려간다. 택시 하차에서부터 삶의 하차로 향하는 첫 계단을 밟기까지 지체라곤 없었다. 걸음걸음 생의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 꿈속을 구성하는 장면이면서 실화다. 경기도에 사는 33세 싱글맘 A씨는 라디오에서 ‘잊혀진 계절’이 연이어 흘러나오던 2018년 10월의 마지막 날, 어린이집에 딸을 데리러 갔다가 그 길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탄다. 편도행만 끊었다.

A씨는 공항에서 10분 거리의 숙소에 머물며 번개탄을 피웠고, 계획에 실패한 그는 다음 날 새벽, 딸과 함께 택시를 타고 바다로 향한다. 이튿날 함께 사는 친정아버지의 실종 신고로 일련의 과정이 뉴스화되자 댓글 창의 대다수가 모녀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고, 일부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죽을 거면 너나 죽지 아이는 왜 데리고 가냐. 차라리 보육원에 맡겨라!”며 A씨를 비난했다.

나는 누군가가 쓴 댓글 ‘저도 싱글맘이에요. 당신 마음을 알아요. 제발 살아만 있어 줘요.’ 에 추천을 누르고 스크롤을 올렸다. 이불로 감싼 아이를 안고 해변으로 내려가기 직전에 찍힌, 기자의 설명 없이는 어둠과의 분별이 어려웠을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 하면 흑백사진 속 모녀가 핸드폰 화면을 뚫고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내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엄마에게는 달고 뜨거운 믹스커피를, 아이에게는 따뜻한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서 건네줄 참이었다. 그러고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혼자 떠들어대는 것이다.

춥죠. 밤바다는 좀 으슬으슬하잖아요, 속초든 제주도든. 저런, 엄마 손이 얼음장이네. 컵을 이렇게 감싸 쥐어봐요. 어? 아이 손은 따뜻하네요? 엄마가 이불로 감싸 안아 그렇구나. 그렇죠. 내 아이만큼은 춥게 만들고 싶지 않지요. 저도 그랬어요. 소림이가 태어난 그해의 가을 저녁- 아, 소림이는 제 딸이에요. 지금은 어린이집에 있을 시간이죠- 아이 기저귀를 갈아주려다 말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어요. 행인을 붙들고 아무 말이나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요, 미친 여자처럼요. 진짜로 미쳤었는지도요. 남편이랑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때였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호기롭게 나가서는 그냥, 멀뚱히 서 있었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음, 그래서 다행이었죠. 그 골목도 밤바다처럼 으스스했어요. 깜박이는 가로등이라도 있기에 망정이지. 그런데 그 으스스함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거예요. 내려다보니 글쎄, 슬리퍼 속 제 발이 맨발인 거 있죠. 이런, 아가야 춥지! 하고 보니 소림이는 구름 그림 담요로 감싸여서는 아기띠에 매달려 방긋거렸어요. 발엔 수면 양말이 신겨 있었고요. 그쪽이나 나나 제정신 아닐 때도 아이의 체온만큼은 지켜준 거죠.

거기까지 얘기하자 모녀가 사라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만이 눈앞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 우주를 닮은 심해를 유영 중인가. 어째서 제주도인지. 갈 수 있는 한 멀리 간 곳이 그 섬이었을까. 하긴, 누구나 제주도를 꿈꾸지. 꿈꿀 수 있고 꿈꿔도 되지. 가난할 때도 그나마 가 닿을 수 있는 근사한 곳이라서. 비행기도 태워줄 수 있고 말이야. 부모라면 한 번쯤 아이에게 비행기를 태워주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이왕이면 짧은 바다라도 건너야겠지. 아이야, 창밖을 봐. 우리가 바다 위를 날고 있어.

물속으로 사라진 다른 여인을 안다. 그녀의 이름은 시엔, 고흐의 그림 ‘슬픔(sorrow)’의 모델이다. 고흐는 헤이그에 정착한 그 겨울, 거리를 헤매는 한 연상의 여인을 만난다. 매독에 걸린데다가 알콜 중독자인 여인은 다섯 살짜리 딸을 업고 매춘으로 구한 빵을 먹고 있었다. 아비 없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아직 제왕절개 자국이 욱신댈 때, 인터넷 서핑 중 ‘슬픔’과 조우하고 길게 울었다. 서른 좀 넘은 나체의 여인이 그루터기에 웅크려 앉아있다. 세운 무릎 위로 포갠 양팔에 얼굴을 묻은 채다. 출산을 2개월 앞둔 여인의 가슴은 주위의 들꽃처럼 축 처져있었다. 깡마른 시엔, 배만이 볼록하다. 세상을 보려 하지 않아 숨겨진 얼굴이 내게는 보였다. 삶이 고달픈 고개는 중력에 쉽게 자신을 내어준다.

“나는 진심으로 시엔을 좋아하고 그녀 역시 그렇다. 그녀는 나와 어디든 동행하고 있고,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이 아니겠니.”

“시엔이 어젯밤에 애를 낳았는데, 아주 힘든 출산이었다. 고맙게도 잘 견뎌냈고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테오야, 햇빛이 환히 비치는 창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자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들더라.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아이가 누워있는 요람 옆에 앉아있을 때 깊고 강렬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 중에서)

도리 없이 불행을 알아보는 건 불행이다. 그때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서로를 알아볼 때 탄생하는 별 같은 것. 불행에 불행이 더해진 값이 행복일 수 있는 까닭이다.

얼마 안 가 고흐 가족의 반대로 그들은 전보다 더 불행해진다. 형 사랑이 컸던 테오의 반대가 가장 극렬하여 연인의 동거는 1년 반 만에 끝났다.

본래 시엔은 어디서도 주인공이 아니었으므로 이별 후 고흐의 이야기만이 이어졌다. 나는 시엔이 궁금하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어찌 살아갔을까. 점프한 그녀의 이야기가 착지한 지점에는 재봉사로 살던 시엔이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한 문장만이 남아 있다.

수색이 시작됐다. A씨와 딸의 시신은 사고 발생지점으로부터 각각 5km, 15km 떨어진 해상에서 발견되었다. 어찌 된 영문일까. 엄마와 딸은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다.

많은 날, 시엔처럼 그녀도 등을 말고 앉아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으리라. 고흐는 ‘슬픔’ 하단에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슐레의 문장을 적어놓았다. ‘어떻게 이 땅에 여인 홀로 있을 수 있지’.

CCTV를 되감듯 시간을 돌리고 싶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택시가 서는 지점에 미리 도착해 모녀를 맞이할 것이다. 물론 소림이랑 함께다. 모녀에게는 우리가 미래에서 왔음을 밝힌 다음 바닷가 앞 민박집에서 같이 놀아야지, 아침이 올 때까지, 우리 모녀가 좋아하는 그림책 <바다 건너 저쪽>을 보면서.

뒷짐 진 소녀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의 상상 속에서 바다 건너 저쪽은 바다였다가 밭이었다가 놀이터였다가 무서운 괴물이 있는 곳이었다가 별님이 반짝이는 밤이었다가 한다. 그리고 마지막 상상.

“바다 건너 저쪽은 모래밭일까.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쪽을 보고 있을까. 내가 지금 그곳을 바라보듯이.”

어느새 친해진 우리 넷, 그림책 소녀의 마지막 말을 함께 외친다.

“바다 건너 저쪽에 가 보고 싶다!”

빈센트 반 고흐의 석판화 ‘슬픔’. 1882년 작. 웅크린 여인은 시엔이라는 이름의 창부다. 고흐는 그녀를 사랑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석판화 ‘슬픔’. 1882년 작. 웅크린 여인은 시엔이라는 이름의 창부다. 고흐는 그녀를 사랑했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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