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부터 이혼하기까지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태풍의 시간이었다. 그것이 소형인지 초대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태풍은 오직 태풍이므로 내 작은 울타리 안의 것들은 속속 찢기고 무너졌다.

그 태풍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출산하러 가는 날, 내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설렘이랄지 기쁨이랄지 그런 단어를 억지로 떠올려보다가 진저리를 치며 신에게 빌었다.

“아기가 태어난 순간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보다 끔찍한 기도를 들은 적 없다(이 기도로 내 이름은 지옥행 열차 탑승객 명단에 박혔다). 그러자 진통이 시작됐다. 그는 “진통은 그대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니 아내의 허벅지 안쪽을 주물러 통증 완화에 힘쓰시오”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도 다리 꼬고 앉아 그녀와의 메신저에 여념 없었다. 진통이 썰물로 나간 틈을 타 나는 복도로 나갔고, 밀물이면 기어 다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도에 응답받지 못한 엄마와 아기만이 남았다.

재난의 끝에 질문을 가장한 명령이 놓여있었다.

‘수습해야 하지 않겠니?’

태풍의 잔재를 치우는 등 수습할 거리가 한두 가지 아니었으나 모성 발굴이 가장 시급했다. 본인의 뼈 어딘가에 새겨있을 모성을 발견 못한 초보 엄마는 가까운 친척처럼 소림을 돌보았다. 아주 오래전, 남편바라기였던 친구 H는 딸을 낳은 뒤 “이젠 내 딸이 최고의 애인이야”라며 웃음을 보였었다.

사랑해, 이 말을 소림에게 의식적으로 건네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에겐 왜 그 느낌이 오지 않는지 오긴 올 건지 갈수록 초조해졌고, 그럴수록 나는 열정적으로 동화책을 읽어줬다. 연기에 소질 있는 나는 그때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친근한 엄마였다. 소림은 특유의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쑥쑥 잘도 커갔다.

소림은 또래보다 키가 크고 말도 빨랐다. 네 살이 되면서 시 같은 말들을 곧잘 건넸는데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찌르르하여 드디어 사랑이 온 것인가 기뻐 탄성을 질렀다.

이런 식이었다. 함께 손잡고 밤길을 걷다가 엄마, 하고 소림이 말을 건다. 응, 대답하니 우주의 언어를 담기엔 아직 어리숙한 네 살의 혀가 행복하다고, 행복하다는 단어 없이 행복을 말한다.

“엄마랑 나한테 별가루가 떨어지고 있떠. 반딱반딱 반딱반딱”. 그 순간 세상은 멈췄고 별가루 샤워를 하는 우리만이 살아 움직였다. 나는 우리 애기, 하면서 소림을 꼬옥 안았다. 그러면 작은 별을 닮은 손이 내 등을 토닥토닥 토닥토닥…, 콧등이 시큰해진 나는 재빨리 소림의 손을 잡고 가던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같은 곳을 보면서.

다섯 살이 된 소림은 어느 저녁 밥상 앞에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엄마,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줄 알아? 원래 난 아기 행성에서 놀고 있었어. 놀면서 세상을 다 볼 수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엄마를 딱 발견한 거야. 착하고 예쁜 저 사람이 내 엄마다! 나는 엄마를 놓칠까 봐 같이 놀던 친구들한테 ‘얘들아, 너희도 좋은 엄마 만나길 바랄게. 안녕’하고 엄청 빨리 지구로 날아왔어. 그래서 엄마랑 나랑 만난 거야.”

나는 그날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그 먼 데서 날아왔다니, 힘들었겠다. 나를 선택해 줘서 정말 고마워”하면서 나는 아이를 안았다. 어김없이 작은 별이 내 등을 토닥토닥 토닥토닥, 그 별은 전보다 커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자가용이 없는 나는 늘 소림의 손을 잡고 걸어 다녔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우리는 잘도 다녔다. 집에 있으면 내 우울증이 깊어지기도 했거니와 아빠가 없어서 더더욱 활기찬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그날도 우리는 버스에 킥보드를 들고 타면서까지 월드컵공원에 갔다. 공원 내부로 들어가던 중 킥보드 타고 가던 소림을 놓쳤다. 하지만 걱정 없다. 언제나처럼 그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달려가니 스케이트보드 인파 속에서 킥보드를 달리는 꼬꼬마 소림이 보였다. 우린 서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야!” 그때 오른쪽 운동화 속 침입자가 발바닥을 찔렀고 내 몸짓을 본 소림이 달려왔다.

“엄마, 왜 그래?”

“별것 아니야. 신발 속에 뭐가 있나 봐.”

그 말을 들은 소림이 내 발밑에 쭈그려 앉았다.

“엄마, 신발 벗어 봐.”

나의 만류에도 내 운동화를 가져간 소림은 그 작은 손으로 운동화를 거꾸로 해서는 그것을 바닥에 대고 팡팡 털었다.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왔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다만 소림의 “이제 됐다” 소리를 들었다.

작은 몸을 웅크려 더 작아져서는 반달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엄마. 이제 됐어, 괜찮을 거야. 아픈 데가 어디야? 여기? 여기?” 하며 내 발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는데 괜찮아의 ‘괜’을 말하려던 나는 그만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의 양방향으로 스케이트보드 행렬은 쉴 새 없이 흘러갔고 “울어? 그렇게 많이 아파?”라는 소림의 말에 나는 눈물을 닦으며 하하 웃었다.

그리고 여기서 Stop!

나는 되감기 버튼을 눌러 1분 전으로 갈 것이다. 운동화를 털고 난 소림이 나를 올려다보며 ‘이제 괜찮아’ 웃던 그 장면으로. 예술가가 될 시간이다.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그것의 어원은 아나(ana:前)와 크로노스(khronos:時代)로 대개 ‘시대착오’를 뜻하나 영화나 미술 작품에서는 비시간성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작가의 의도로 배경과 등장인물 간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아나크로니즘은 시간 순서의 위반.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대포가 등장하는 것이 그 예다.” (미셸 트루니에 ‘뒷모습’ 중에서)

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반달눈의 소림을, 행여 그 작은 몸을 건드릴까 온 신경을 집중해 오렸다. 2014년의 산부인과 복도로 시간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저기에 한 여자가 복도를 기어 다니고 있다. 나는 나를 지우고 내 시선만을 남겼다. 그리고 내 영혼의 눈앞에 반달눈 소림을 데려왔다. 소리만은 지워지지 않아 곧 엄마가 될 그 여자의 눈이 진통에 신음하자 반달눈 소림이 눈을 보고 말했다.

“엄마. 이제 됐어, 괜찮을 거야. 아픈 데가 어디야? 여기? 여기?”

잠시 킥보드를 내려놓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소림이. 이 아이의 머릿속엔 무슨 시(詩)가 오고가고 있을까. 나는 영원히 이 아이의 좋은 엄마, 착한 엄마이고 싶다
잠시 킥보드를 내려놓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소림이. 이 아이의 머릿속엔 무슨 시(詩)가 오고가고 있을까. 나는 영원히 이 아이의 좋은 엄마, 착한 엄마이고 싶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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