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소영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 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

- 김기택, <신생아 2>

너의 감수성과 재치를, 너의 따뜻함과 서늘함을, 너의 관대함과 예리함을, 그리고 찾아올 너의 맑고 환한 모성을 사랑하는 K 씀. 2010. 7.

K언니가 유산 후 실의에 빠진 나에게 건넨 책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의 첫 장에 적혀 있는 그녀의 메시지다. 나에게는 K언니를 비롯하여 13년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나누는 여인들이 있다.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언니다. 그녀들은 나 모르게 ‘파수꾼 단톡방’을 만들어서는 우리 집 쪽으로 더듬이를 세우고 있었다.

급기야 남편이 짐을 싸서 나갔다. 남들은 퇴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거실에 깔린 이불 위에서 바동거리는 아기 소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별안간 쫓기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급해진 나는 그녀들 중 동갑내기인 N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 내가! 내가아아아, 흑흑.

- 소영아, 울어? 왜 울어!!

- 내가 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흑흑. 이게 다 뭐야!

- 소영아, 나 퇴근하는 버스 안이니까 지금 내려서 바로 전화할게. 알았지?

- 아냐, 그대로 가. 나 괜찮아.

그리고 5분 뒤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액정에 C 언니의 번호가 떠있다.

- 소영아, 괜찮니? 지금 갈게.

- 네?

- 다들 너한테 빨리 가보라고 난리야.

- (다들이라니...) 왜...요?

- 몰라몰라. 빨리 가보래. 주소가 어떻게 되니?

- 예...그러니까 제 주소는...

나는 서울에 살고, 여인들은 경기도, 대전, 경북, 부산에 거주하므로 나와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사는 C언니에게 ‘소영이가 이상하니 당장 그 집에 가’보라는 대원들의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파수꾼 단톡방’에 자살경보가 울린 것이다.

별안간 퇴근길에 우리 집으로 호출당한 C언니는 “야! 우리 소영이가 암만 그래도 절대 스스로 죽진 않는데 말이야. 다들 걱정이 많네” 하면서 다크서클이 짙어진 눈으로, 하지만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뜯지도 않고 팽개쳐 놓은 택배 상자에서 아기 운동장을 꺼내 조립해주고 가셨다.

나는 얼마간 살기 싫었으나 딸내미를 두고 떠난 어미로 남는 불명예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아직은 모성을 자각하진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하나 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옹벤저스, 동백이를 지켰던 그 동네 언니들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으로 힘이 센 다정으로 무장한 나의 여인들 때문에 나는 삶을 선택했다. 실망감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리라.

올 사람도 없는데 벨이 울려 나가면 O마트 배달 기사님이 L언니 이름이 적힌 주문서와 온갖 종류의 식품을 들고 서 있었다. 또 다른 C언니는 시시때때로 찾아와 말동무해 주었고, 가정법원에 가는 날엔 친구 N이 달려와 소림이를 봐줬다. S&H 언니는 기프티콘을 보내며 사랑한다 했고, K언니는 책이며 화장품이며 이것저것 보내오다가 하루는 먼 곳으로부터 와 소림이랑 놀아주었다. 칼국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K언니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감추며 서울역으로 향했다(나는 그 칼국수 맛이 그저 그랬던 것이 여전히 걸린다). H언니는 소림이 백일 날 오자마자 대뜸 걸레질부터 하더니 천장에 풍선을 달고 생일 송을 불렀다.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넌 혼자가 아니’라고 온몸으로 말했다.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그녀들이 더 필사적이었다.

행성 모두가 별을 가진 건 아니다. 항성계에 속하지 않아 외로이 우주를 떠도는 행성, 일명 떠돌이 행성이 있다. 태양을 별로 삼은 지구는 그것을 중심으로 일정 궤도를 공전하나 떠돌이 행성은 이리저리 검은 바다를 부유할 뿐이다. 지구라는 우주, 여기에도 떠돌이 행성이 있다. 자기만의 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신의와 사랑을 질량으로 삼아 거대 중력을 일으켜 궤도에 안착시켜줄 태양이 나는 필요했다. 전 남편은 그 별 역할을 톡톡히 해 준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수명을 다한 내 별이 Bomb! 폭발했는지 사라졌다.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변화가 없다. 실눈을 뜨니 다시 떠돌 줄 알았던 내가 여전히 궤도 선상에 있지 않겠는가? (알고 보니 전 남편도 떠돌이 행성이었다. 부디 다른 항성계의 일원이 되어 있기를).

태양은 어느 한 사람만으로는 탄생할 수 없었다. 나의 태양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두의 이름이 뭉쳐 만들어진 기적의 별이었던 것이다!

여인들의 비호 속에 해가 바뀌어 소림이는 두 살이 되었다. 2015년 어느 아침, 나는 애청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문자 사연을 보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리더이자 DJ였던 가수 윤덕원이 내 사연을 읽는다.

“사랑하는 여인들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 순간 그녀들의 이름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어쩌면 우주로까지 울려 퍼졌다. 오래전, 외계인이 들었을지도 모를 그 이름들과 다른 이름들이 모였고 그것은 나의 별이 되었다. 떠돌지 않아 더는 떠돌이 행성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궤도를 공전한다. 안정권에 들어섰다.

K언니가 유산 후 실의에 빠진 나에게 보낸 책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자궁'의 앞 페이지에 적어준 메시지. 이 책은 한의사 이유명호가 자궁의 위대함에 대해 쓴 책이다.
K언니가 유산 후 실의에 빠진 나에게 보낸 책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자궁'의 앞 페이지에 적어준 메시지. 이 책은 한의사 이유명호가 자궁의 위대함에 대해 쓴 책이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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