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철문이었다. 철문 하나가 두 개의 세상을 구분 지었다. 을지로의 오래된 건물, 2층으로 가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다. 아홉 살의 내가 손잡이를 돌린다. 철컥, 신세계가 열리자마자 훅 종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가 싶더니 이내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어디인가. K인쇄소, 내 아버지의 생업이자 자부심의 원천.
북녘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에게 할머니 등을 내어준 채로 피난 왔다고 했다. 이어서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들어 온 아버지의 레퍼토리가 시작된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자취했고 언제나 1등을 도맡았지. 집도 늘 깔끔했다고. 어디 그뿐이냐? 성격 좋고 노래 잘하고 놀기까지 잘하니 학생회장은 늘 나일 수밖에 없었고, 뭐? 어떻게 놀 거 다 놀면서 공부까지 잘하냐고? 불가능이란 없다! 그게 나란 말씀이지. 그래서 말인데 야, 너희들은 왜 공부를 안 하냐? (오빠를 가리키며) 너는 맨날 거울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 원, 대학만 좋은 데 가봐라, 여자들이 줄줄 쫓아다닌다고 나처럼.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소영이 너는 허구한 날 영화나 보고 앉았고, 그게 아니면 소설책만 들여다보니 어휴 공부는 언제 하니? 너는 오빠랑 달라서 특별히 말썽부리는 것도 없는데(모르신다고 없는 사실인 건 아니죠) 그러면 뭐 하냐?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으라고 좀, 잠도 줄이고. 4당5락 몰라? 제발 좀 미래를 생각해. 몇 년만 공부에 전념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니. 어? 소영이 너 지금 하품하는 거니? 아니 그렇게 잠을 자고 또 하품을…어휴. 아빠 봐라.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대를 차석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K인쇄소를 기깔나게 일구었잖냐!”
따갑다. 글로 재연했는데도 귀가 따갑다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지금도 외우는 아버지의 설교다. 그래요. 아부지는 대단하셔요. 제가 별 볼 일 없어 그렇죠. 그런데 아부지, 어쩌겠어요? 생긴 대로 사는 거지 저라고 뭐 간지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나저나 간지라고?
간지. 간지? 간지!
지금부터 말할 것은 일본어에서 온 ‘かんじ나다’의 간지 아닌 ‘간지(間紙)’다.
1987년 어느 저녁, K인쇄소에 들어서자 내 눈동자는 던져진 팽이처럼 돌았다. 종이 내음, 떡 제본의 본드 냄새, 데드라인 직전 신문사처럼 분주한 사람들, 직원들의 손가락 춤사위에 따른 타닥탁 경쾌한 타자 소리, 인쇄 중인 마스터 기계가 광광광 탄력 있게 돌아가는 소리.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만 도로 나갔다. 조용하다. 다시 들어오니 아까와 똑같다. 이어서 K오케스트라의 불협한 협화음을 뚫은 지휘자의 독려가 사무실 중앙으로 내리꽂혔다.
“얘들아, 오늘도 철야다. 힘내자!”
나는 잠자는 계단을 올라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생명이 부여된 이 공간은 그 자체로 꿈틀대며 몸속 장기들과 연동하고 있었다. 그때 오빠와 나를 발견한 지휘자가 “왔어?” 하며 달려왔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던 청년의 아버지가.
“배고프지? 나가자. 아빠는 저녁 먹고 다시 들어와야 해.”
“근데 저거.”
나는 색 도화지로 쌓아 올려진 종이 탑을 가리켰다.
“아, 저거. 간지로 쓰는 색지야. 알록달록하니 예쁘지? 색지랑 흰 종이랑 맘껏 집어 와.”
남매는 동굴 속 금은보화를 허락받은 양 신나서는 종이를 잔뜩 집어와 커다란 서류 봉투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빠, 간지가 뭐예요?”
“간지? 간지는 그러니까…한 권의 책 속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 하나 끝나면 분홍 종이 한 장 꽂고, 또 그다음 이야기 끝나면 노랑 종이 한 장 꽂고, 그러다가 마지막 이야기 전에 하늘색 종이 꽂고 그러거든? 그 색지가 간지야. 즉, 이야기 사이사이 쉼표 종이다, 그 말씀이지.”
K인쇄소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만들진 않았다. S사 직원용 교재(대개 컴퓨터 프로그래밍 책)를 제작했는데, 컴퓨터 상용화 전엔 타자기를 쳐서 인쇄용 원고를 만들었다. 인쇄, 제본을 거쳐 마지막 제단까지 마치면 (제단기의 그 날카로운 작두라니!) 미끈한 책 쌍둥이들이 수십, 수백 권 탄생했다. 그것들은 그림책이 아니어서 나의 관심을 끌진 못했으나 책이란 아주 깔끔하고 그럴싸한 물질이라는 것만은 알게 해주었다.
그날 내가 집어 온 다양한 크기의 색지는 책상 서랍에 들어간 뒤 방치되었다. 인쇄소에서라면 책 중간중간 자리했을 간지용 색지들은 공작도 그리기도 즐기지 않는 주인에게 선택된 불운 때문에 간지나게 살다 가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누구를 만나느냐가 관건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나를 방문한 날, 과거의 간지에 관해 물었다.
“아빠, 그때 간지 안 넣었던 파본 기억나요?”
“기억나지 그럼.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어.”
“간지 없으면 안 되나, 괜히 신경만 쓰이고.”
“무슨 소리! 간지 없어 봐라. 이야기와 이야기의 경계가 사라져. 이야기란 1막 2막 구분해야 하는 법이야. 삶 전체가 연극이고 너는 배우라고 생각해라. 그러면 덜 억울해. 네가 처음부터 싱글맘은 아니었잖니? 장마다 소제목을 붙여 봐. 정리가 되면서 방향이 보이고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 떠오를 거야. 그게 책 제목이지. 소영아, 힘들지? 그래도 한부모라는 포지션이 ‘쓰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만은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복이야. 그리고 간지는 휴식의 의미이기도 하니 좀 쉬면서 가도 돼. 아빠 멋있지? 나의 유머 유전자 덕에 네가 잘 헤쳐나가고 있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말고.”
“…왜 항상 마무리는 자화자찬인 거죠?”
“하하하, 역시 내 딸의 유머란!”
저번 만남보다 좁고 동그래진 어깨로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아홉 살일 딸을 커다랗게 안아주고 돌아섰다.
간지로 살고 싶다. 사람들 사이사이 자리해 다르면서 비슷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 한 권의 책을 만들자. 간지가 된 나는 소속감에 잠이 든다. 이야기를 이불 삼아 마침내 쿨쿨, 꿀잠을.
그래.
간지, 나다!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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