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꿈 있어. 진작 있었어. 여섯 살부터 지금까지 쭉 있었다고. 엄마. 내 꿈은 엄마야. 난 소꿉놀이해도 맨날 엄마였잖아.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게 내 꿈이고, 그냥 주만이랑 결혼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엄만 꿈으로 안 쳐줘?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계발 해야 해? 니들 다 잘났고 자기 위해서 사는데 나 하나 정도는 그냥 내 식구들 위해서 살아도 되는 거잖아. 그거 니들보다 하나도 못난 거 없잖아.” (드라마 ‘쌈, 마이웨이’ 중 설희의 대사)

브라보!

네 살 딸아이를 한 시간 넘게 달래가며 겨우 재운 4년 전 어느 밤이었다. 발끝까지 내려간 다크서클을 말아 올리며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설희의 울분이 터짐과 동시에 물개박수를 쳐댔다. 시류에 반하여 꼭꼭 숨겨온 내 꿈을 임상춘 작가가 알아주다니!

유년부터 30대 중반까지 부모님 사이의 다리로 살았던 나다(끝내 갈라지셨다). 어떤 이는 비슷한 이유로 결혼을 피하지만 나는 그리하여 결혼을 꿈꿨다. 몽상가인 나는 잔디밭에서 뛰놀며 비눗방울, 민들레 씨앗 따위를 후 불다가 뜬금없이 눈 맞추고 하하 웃는 공익광고 속 가족을 자주 설계했다. 상상만으로도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설희의 꿈에 ‘동화작가’만 덧붙이면 완벽할 것이었다.

나는 싱글맘이다. 이 문장을 쓰자마자 헛웃음이 터진다. 분명 공익광고 아빠 자리에 적격인 남자와 결혼했건만, 그는 반복된 유산 끝에 태어난 기적의 아기와 나를 두고 내뺐다. 웬만하면 ‘다른 인생을 찾아 길을 떠났다’ 정도로 은유하려 했으나 그러기엔 확실히 내뺐다.

2013년 9월, 임신 판정 후 나는 어떠했는가. 마음이 널뛰었지만 임신 초기라 서두르지 않았다. 설레는 맘 어쩔 줄 몰라 아기 신발에 내복에 이것저것 사들였다가 뱃속에서 심장이 멈춘,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뛰지 않았을, 의학적 관점으론 배아, 나에겐 그저 아기였던 씨앗과의 이별을 몇 차례 겪었기에 이번엔 막달까지 기다렸다.

맘 카페를 들락거리며 준비물 목록을 작성했다. 그중에 ‘유축기’가 있었다. 유축기는 깔때기로 모유를 빨아들이는 기구다. 출산 후 유축기의 필요 유무를 알 수 없어 구매를 망설이던 중 구청에서 고품질의 제품을 대여해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장 예약해야 조리원을 거쳐 집에 돌아올 때쯤 수령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예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 비보가 전해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남편의 내연녀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죄스럽게도 더는 세월호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세상사 관건은 타이밍이다.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외도 중인 자에게 고하나니 “들킬 거면 출산 후에 들켜라!”

출산을 한 달 앞둔 5월 내내 소림이가 내 배를 얼마나 자주, 세게 찼는지 모른다. 우는 엄마를 위로하는지 같이 우는지 모를 소림의 발차기에 꿀렁꿀렁 부른 배가 춤췄다. 출산 당일 진통 중, 태풍의 소멸처럼 한순간 출산 의지가 꺾여 제왕절개를 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품에 밀려 들어온 아기는 자꾸만 젖을 놓쳐 강아지같이 칭얼댔다. 산후조리원에서도 아기는 젖을 물면 바로 놓쳤다. 우울증에 잠식당한 나는 모성 신화를 재현 못 해 그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조리원 도우미에게 분유를 요청했다. 그런데, 그래도, 모유를 조금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유축기가 필요했다.

2주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연 것은 홈 스위트 홈 현관문이 아니었다. 지옥문이 열렸다. 이혼, 이혼, 이혼을 노래하며 차가워진 남편 옆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함에도 홀로 아기를 키우기 두려웠던 나는 ‘을’처럼 굴었고, 신생아 돌보기에 남편 말 못 듣는 척하기에 수면 부족에 거의 죽음을 살고 있었다. 와중에 유축은 성실히 이어갔다. 남편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실에서 나오는 소리, 욕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진다. 어서 끝내야 해! 나는 옷 방에 쭈그려 앉아 왼쪽 가슴부터 유축을 시작했다. 쉬이익 쉬이익 일정한 리듬의 압축 사운드에 맞춰 상앗빛 모유가 똑, 똑, 때론 주루룩 우유병을 채운다. 이 정도면 됐나? 조금 더 나올 것도 같은데. 이런, 샤워 다 끝냈나 봐. 머리 말리는 시간밖에 못 버네. 아쉬웠지만 깔때기를 오른쪽 가슴으로 옮겼다. 소림에게 먹이려면 이것까지 해서 100ml는 채워야 해. 순간 발동한 모성인지 오기인지 모를 그 마음에 스스로 좀 놀라며 나는 유축을 이어나갔다. 위이잉 드라이기 소리가 들린다. 20ml만 더 채우면 되는데 어서어서 제발. 똑, 똑 말고 주루룩을!

그때였다. 덜컥, 문이 열렸다.

- 뭐 해?

- 유축기 하잖아.

- 흐음.

흐음?

엿 같았다. 나는 한 마리의 젖소, 눈앞의 냉혈인은 목장 입장료도 안 낸 주제에 젖소를 구경한다. 더는 탐닉의 대상이 아닌, 본인 자식이 먹을 젖 짜는 암소를. 동시에 팽팽한 가슴을 뽐내며 스물다섯 그녀가 환영으로 등장했다. 그녀는 남편과 눈 맞추고 그의 팔짱을 끼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깔때기 댄 내 가슴을 가리키고 깔깔깔 웃었다. 그 순간 이혼 주동자가 나로 바뀌었다. 반전의 묘미에 나는 몸을 떨었다.

유축의 다른 의미는 ‘어린 가축’이다. 언제까지나 어린 가축이길 원했던 나는 한 마리의 유축(幼畜)을 세상에 내보낸 후 어미가 되었다. 그 유축은 샴쌍둥이여서 나는 그들을 조심스레 분리했다. 나였던 유축을 독립시킨 후 소림이 유축에게 모유를 짜 먹이는 데만 집중했다.

정정한다. 순서가 바뀌었다. 어미는 아기에게 유축기로 짜낸 우유를 먹이는 데만 여념하고 ‘나’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나’ 유축은 우리 옆에 자기 무릎을 안고 앉아 수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더니 그해 겨울 어느 아침에 사라졌다. 밖은 추울 텐데……. 눈물이 올라왔지만 울지 않았다.

나의 동력, 좋은 엄마와 동화작가가 되는 것. 이 꿈의 실현에 남편의 부재는 무방하다.

 2017년 방영된 KBS드라마 '쌈, 마이웨이'.  남들이 뭐라하든 '마이웨이'를 가려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KBS홈페이지)  
 2017년 방영된 KBS드라마 '쌈, 마이웨이'.  남들이 뭐라하든 '마이웨이'를 가려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KBS홈페이지)  

(홍소영은) 아기 행성에서 놀다가 나를 보고 지구로 날아왔다는 여덟 살 딸 소림과 살고 있다. 페이스북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소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좋아하는 페친이 매우 많다. 우주 이야기에 열광하고 동화 작가와 오로라 여행을 꿈꾼다. 여전히,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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